널리 쓰인 속기법의 발명자이기도 한 티로에 대한

노예들은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일을 맡았다. 개인 소유의 노 예 중 도시지역의 노예들은 매우 다양한 일에 종사했지만, 농경지역에 사는 노예들은 형편 이 그리 좋지 않았다. 또 한 집안에 사는 노예 사이에도 주인의 신임 정도와 그들의 능력 에 따라 생활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노예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는가 하면- 심지 어 일부 노예들은 자시 노예를 거느리기도 했다- 거의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주인의 상담 자나 긴밀한 협력자, 주인의 친구 역할까지하는 노예도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노예와 농 장에 묶여 비참한 환경에서 육체노동을 하던 노예들이 있었다. 키케로와, 그의 노예이자 16세기까지 이야기는 주인과 자유노예간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이다. 키케로와 그보다 세 살 아래인 티로는 같은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 키케로는 티로 에게 늘 관심을 두고 살펴보면서 그를 심복으로 만든다. BC 53년 키케로가 마침내 노예신 분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때부터 티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라는 옛 주인의 성을 자신의 이 름 앞에 붙인다. 이제 티로도 로마 시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티로는 이후에도 키케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위해 일한다. 두 사람이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암살당한 후에도 티로는 옛 주인이자 친구가 생전에 남긴 편지와 연설문 등을 모아 출간하면서 활발하게 추모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이 러한 예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키케로가 죽고 100년 후, 원로원은 주인이 자신의 집에서 암살당한 경우에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노예는, 설령 그가 이미 해방된 노예라 할지라도,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도시나 공공단체에 속한 공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예와 자유노예들은, 주인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주인의 성과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더라도, 그래서 로마 시민이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주인의 권력과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 로마 시민이 되는 것 여타의 고대국가와는 달리, 로마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노예와 외국인에게 선별적 으로 시민권(오늘날의 국적)을 부여했다. 주인이 개인적으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거나 공공 의 결정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시민권을 주었으며, 그것은 개인이나 한 가족, 또는 환 집단까 지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 노예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거나 로마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대 사로 혜택을 준 것이다. 이러한 "귀화정책"은 별다른 체계없이 이루어졌으며, 사안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시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시민권외에도 출신 도시에 따라 분 류한 또 하나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두 개의 시민권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 렇다고 어느 한 시민권에 따르는 의무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로마 시민의 수는 기원 초에는 1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400만 명이었다). 로마 제국의 울타리 내에서 살고 있던 5000만 명의 사람들(이 수치는 로마의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에 비하면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로마의 이름을 앞세워 엄청난 특 권을 누렸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출신 도시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BC 212 년 바시아누스황제는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 내에 살고 있는 자유민 신분을 가진 모든 외국 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이 칙령은 안토니우스법이라 불린다). 이 칙령은 로마의 자유시민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가장 큰 장벽을 철페한 것이었다. 이후 모든 자유시민은 로마의 법 앞에 평등했으며, 로마법의 보호와 혜택을 동등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